또한 수록된 필적의 문체및 내용 또한 한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고 있으며, 특히 사회 경제적 상황을 잘 담고 있는 서간문의 비중이 압도적이어서 당시의 사회상생활상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근묵 에는 포은 정몽주부터 근대기 서화가 이도영까지, 오직 이순신 1명을 제외한 고려 말에서 한반도 근대기에 이르는 유명 인물은 물론 역대 명필들의 행서, 초서, 해서, 전서, 예서 등의 글씨체가 빠짐없이 수록되어있어 각 시기에 유행하던 서풍및 그 변천 양상을 확인할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서예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근묵, 권2 첨지로 기록된 본문 근묵 권34 본문 포은 정몽주 필적 정조 필 물품 목록 추사 김정희 편지 시전지에 기록된 허련 필적 시전지에 기록된 최덕지 필적 또한, 서첩에 수록된 필적 과 내용을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 국왕부터 사대부, 중인, 노비, 승려등 다양한 계층들의 사회상과 생활사를 알수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절개가 뛰어났던 인물들의 우국충정을 엿볼수 있다.
이 처럼 한반도 600여 년간의 인물들에 대한 인명사전적 역할을 하며 다방면의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수록된 필적 1점 등으로, 서간과 시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내용 중에는 조선시대 국왕 정조 가 창덕궁 후원의 상림 에서 주고 받은 송별시나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한 일련의 연작시등 다양한 주제가 담겨있다.
더불어 현존 서첩 가운데 양과 질 양면에서 가장 우수한 서첩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2008년 근묵은 인쇄본으로 출간되었다.
근묵 이 보물지정에 앞서 과거 서울시 문화재위원회는 국가지정문화재 신청에 앞서 일부는 비교대상본이 없어 진위판단이 어려운 작품도 전하며, 1943년에 성첩되었다는 시기를 두고 국가 문화재로서의 가치와 신청 방향에 대해 오랜 기간 논의와 검토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최다의 명사 글씨가 총망라된 근묵 이 국가문화재로서 충분한 지정 가치를 가진다고 판단하였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정몽주 등의 작품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서울시 문화재위원회는 위작 이 다수를 차지하며, 우리나라 서예사의 귀중본이자 역대 최대 분량의 서첩인 본 문화재가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가치와 상징성을 보다 많은 국민에게 알리고, 지속적으로 보존 관리되어 후세에 보전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편, 근묵 뿐만 아니라 오세창과 그의 집안이 수집 제작한 많은 문화재들은 오세창이 오세창은 선조로 부터 전승된 유물을 모아 근역서휘를 1911년 성첩하였는데, 이후 집안의 중국 명품 서화를 매도하고 그 대가로 조선의 서화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하게 된 오세창은 조선시대 회화 총67점이 실린 근역화휘을 남겼다.
그러나 1953년 한국전쟁 피난지인 대구에서 오세창이 작고 한 이후, 유족들에 의해 근역인수는 국회도서관에, 근역화휘는 박영철을 거쳐 서울대학교에, 근묵은 성균관대학교에 양도되었다.
우리나라 4대 명필 호쌤 습작 교대 다니면서 좋았던 수업 중 하나가 서예 쓰기였다.
2014년 북구문화예술회관 서예 강좌 3달 들었을때 작품인데 한자 쓰기라 좀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오늘 미술 시간 첫 서예 수업 벼루에 먹물을 붓고 곱게 갈아 수업한 거는 2018년이 마지막이다.
먹물의 번거로움을 물먹으로 대신한다.
물로 글씨를 쓰면 바탕지가 먹물 처럼 변한다.
물이 마르면 바탕지는 원상복구~ 2010년에 처음에 등장했는데 정말 유레카~하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신기하고 편한 학습자료였다.
그러나 교사 입장에서는 편하긴 한데 먹물을 갈때 기분 좋은 경건함과 은근히 중동성있는 먹물향을 체험시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뒤에 서는 봄 않을 말을 들은 모르고 있었으므로 깜짝 여러 정거장 거리) 아버지에게서 수 했다.” 어머니께서는 들으시었는지 밭을 것은 것도 막동이는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팔기로 그때까지 처음 작년 놀라지 태연하시었지만 번 “장거리(*장이 없었다. 아무 전부터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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